일전에 그리스인 조르바의 미니북을 산 적이 있었다. 적어도 2년은 지난 것 같은데 가지고 다니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열 페이지쯤 읽고 책장에 쳐박아 두었다. 가끔씩 언제쯤 이 책을 읽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그대로 두기 일쑤였다.

그러다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모노 에디션으로 출간한 책 중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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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하얀 배경 위로 까만 글씨가 돋보이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디자인에 이끌려 책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언젠가 읽어야지 하던 걸 드디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책은 주인공인 ‘나’와 조르바가 함께 크레타섬에 가서 경험한 사건들을 풀어놓는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은 주변 인물에 따라 대명사로만 불려진다. 조르바는 두목이라고 했고 섬의 사람들은 사장이라고 했던 것 같다.

원래 이 둘은 일행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책과 사색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고 몸으로 행동하는 법을 모르는 게 문제였다.

작중 초반 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을 보고 책벌레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래서 주인공은 행동하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 크레타섬의 갈탄 광산을 임대해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보려고 결심했다.

이제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기나 한 듯이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내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실체 앞으로 데려갈 테다.

조르바는 주인공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과 경험을 지닌 인물이다.

배를 타기 직전 주인공에게 먼저 냉큼 다가가서는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다짐을 한지 얼마 안 돼서 뜬금없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함께 하자는 행동을 하는 조르바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허락하면서 함께 크레타로 가게 된다.

크레타섬에 도착한 뒤 오르탕스라는 부인의 여인숙에 묵고, 오두막에서 생활하며 주인공은 조르바로부터 행동하는 삶을 배우게 된다.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갈탄을 캐려고 했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소설을 쓰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조르바는 본능대로 이끌려 산다. 책을 읽는 내내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하고 천진난만하고 천박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감정에 솔직하고 자유롭고 지혜롭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표현한다.

마치 자유라는 개념이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면 그게 조르바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눈치보지 않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거나 어떤 교훈을 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몽땅 쌓아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도 아니고,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 뭔가 썩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우리 기술자들은 <꽈당>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꽈당하는 걸 조심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딛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뒤집혀 박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간다고 골로 안 가나요? 당연히 가죠.
기왕 갈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여자는 꽃병 같은 거예요. 아주 조심해서 만지지 않으면 깨져요.
마음 한번 먹었으면 밀고 나가라, 후회도 주저도 말고.
고삐는 젊음에게 주어라, 다시 오지 않을 젊음에게.

용기! 빌어먹을! 모험! 올테면 오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조르바는 여자의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유식한 양반한테 하나 가르쳐 드리는데,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진짜 여자는 ······ 잘 들어 두시오, 도움이 될 테니까 ······

진짜 여자는 남자에게서 기쁨을 받는 것보다 자기가 기쁨을 주고 있다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법이에요.

최근 유튜브에서 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영화의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Youtube Link

작중에서 하느님과 악마가 빈번하게 사람들의 입에서 거론된다. 조르바는 악마나 하느님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다.

조르바는 어느 수도사를 얘기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 아토스 산에서. - 거기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아 차라리 내 오른손을 자르는 편이 나을 뻔했어요! - 거기서 수도승 라브렌티오 신부를 만났습니다.

키오스 사람이지요. 이 한심한 친구는 자기 안에 악마가 한 마리 들어앉았다고 믿고 이름까지 붙였더군요.

악마 이름이 튀르키예의 호자랍니다. '호자는 성금요일에 고기가 먹고 싶단다!' 이 한심한 라브렌티오는 이렇게 외치며 교회 벽에다가 대가리를 찧습니다.

'호자가 여자랑 자고 싶단다. 호자가 수도원장을 죽이고 싶단다. 그래 호자, 호자가 그런다고! 내가 아니라!'

그러고는 대가리를 돌에다 쾅쾅 찧는 겁니다.

두목, 내 속에도 악마 같은 게 들어 있어요. 나는 그 악마를 조르바라고 부릅니다.

속에 있는 조르바는 나이 먹는 걸 싫어해요.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먹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먹지 않을 거에요. 속의 조르바는 사람 잡아먹는 도깨비에요.

머리털은 칠흑처럼 검고 이빨은 서른 두개(숫자로 쓰면 32), 귀 뒤에다 빨간 카네이션을 꽂고 다닙니다.

바깥 조르바는, 아이고 가엾어라, 장구통배에다 흰 머리카락도 좀 있습니다. 시들어 주름살이 생긴 데다 이는 빠져나가고 커다란 귀에는 늙으면 나오는 흰 털이 늘어 영락없이 길쭉한 당나귀 귀가 되어 있지죠.

두목? 이 조르바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언제까지나 이 두 조르바가 맞붙어 싸워야 합니까? 어느 쪽이 이길까요?

······ 중략

내가 심란한 중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당신 역시 나와 비슷하거든요. 당신이 그걸 모를 뿐입니다. 당신 속에도 악마 한마리가 있지만 아직 이름은 모르고 있고 그걸 모르니까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거예요.

두목, 그놈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럼 아마 좀 나아질 겁니다.

이 악마는 인간의 가식 없는 욕망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도덕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다.

사회적인 규범이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각자가 감추고 있는 숨겨진 본능 그 자체인 것이다.

조르바는 이 악마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주인공과 함께 수도원이 소유한 산의 나무를 벨 수 있게 수도원장에게 승낙을 받으려고 수도원에 찾아갔을 때다.

수도원은 욕망을 절제하는, 신성함과 거룩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방문했을 때 그 곳의 수도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세속적인 욕망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르바는 이들을 비웃었고 경멸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악마에게 지배당해 파멸한다고 봤다.

두 번째는 젊은 시절 조르바가 버찌(체리)를 너무나도 좋아했을 때다.

돈이 없어서 한두 개씩 밖에 사먹을 수 없었던 조르바는 밤마다 온통 버찌 생각만 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 버찌를 왕창 산 다음 토할 때까지 입에 쑤셔 넣었다. 그 다음부터는 버찌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버찌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악마가 원하는 것을 배가 터지도록 주어서 질리게 만드는 것이 조르바만의 방식이다.

조르바는 내면에 악마가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악마가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 악마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삶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조르바의 생각을 보고 나서 나한테는 어떤 악마가 있는지 들여다봤다. 어떤 이유에서든 욕망을 감추고 숨기고 있는 건 아닌건가 싶었다.

주인공과 조르바 모두 자연을 좋아하지만, 자연을 대하고 느끼는 방법 역시 두 사람의 성향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주인공은 해변에 앉아 파도를 보거나 오두막에서 섬을 바라보며 풍경을 시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붓다의 철학이나 사색에 빠져든다.

나는 대지의 속삭임과 입놀림 그리고 미동까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고, 비가 내리면서 씨앗이 불어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해안을 덮쳐 핥아 갈증을 달래는 바다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바다는 한숨을 쉬며 장밋빛이 되었다가 자줏빛, 포도줏빛, 그리고는 짙푸른 색깔로 변해 갔다.
오후에 나는 알이 고운 밝은 색 모래를 한 줌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따듯하고도 부드러운 촉감을 즐겼다.

손은, 우리의 인생이 새어 나가다 이윽고 사라지고 마는 모래시계였다. 손 그 자체도 사라져갔다.

조르바는 직접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온몸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매일 눈앞의 모든 것을 처음보는 것 마냥 신비로워한다. 주인공은 이런 조르바를 보며 경탄한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 - 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 - 을 안을 수 있을까요?

아래의 단락은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자신이 러시아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을 듣고 난 후 주인공이 감탄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 역시 주인공이 대신 전해주는 이야기나, 조르바가 직접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저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 !

내가 선택한 길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내 모든 감각을 완벽히 단련함으로써, 또한 온 몸도 그렇게 함으로써 몸이 즐기고 몸이 이해하게 하리라.

달리기를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조정을, 운전과 사격을 배우리라. 내 영혼을 육신으로 채우리라. 내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저 영원한 두 적대자가 내 안에서 화해하게 만들리라.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은 채 완전히 허비되고 있는 내 인생을 생각했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별빛으로 조르바의 모습을 겨우 분간할 수 있었다.

그는 밤새처럼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부러웠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다, 라고 생각했다. 그의 길이 옳은 길이다.

조르바가 기쁨을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의 채에 걸러서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도 주인공과 비슷한 성향을 일부 지니고 있다. 무언가를 경험하면서도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내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따지거나 계산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어떤 것을 경험하고 나면 그 전과는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감정과 느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온전히 느끼고자 했다. 조르바처럼 말이다.

사물을 바라보거나 느낄 때 한 개의 막을 감싸기 전에, 있는 그대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낀 바를 온전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아직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문자로 나타내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반대되는 성향일 수도)

책의 끝 역자 해설에서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신과 인간처럼 서로 대립하는 관념이나 물질이 결국에는 하나로 융합되는 가치관을 소설에 녹여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곳에서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메토이소노(Metoisono, 거룩하게 되기)라는 개념을 소개해준다.

옮긴 이가 설명하는 메토이소노는 다음과 같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이 개념에 대해 좀 더 살펴보니 메토이소노는 화학적 변화를 넘어선 신성한 본질의 전환을 뜻한다고 한다.

조르바가 고기를 배불리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를 사랑하는 행위(물질과 육체)는 단순히 쾌락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르바는 그 물질적 에너지를 격렬한 춤(작중 조르바는 춤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주인공에게 설명한다)과 노래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정신과 영혼)으로 바꾸어 놓는다.

작가의 메토이소노 철학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렬하게 엿볼 수 있었다.

수도원으로부터 승낙받은 벌목 사업이 조르바에 의해 망하면서 주인공은 모든 재산을 날리고 철저하게 파산한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탓하지 않았다. 슬퍼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한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걱정과 집착이 끊어졌음을 느낀 것이다.

고가 케이블 준공식이 폭삭 망하고 나서 조르바와 주인공은 포도주와 양고기를 실컷 먹으며 즐긴다.

그리고 한 번도 춤을 춰본 적 없던 주인공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며 두 사람은 함께 미친 듯이 웃고 춤을 춘다.

함께 춤을 추며 하나로 결합하는 순간, 메토이소노가 된다.

작가는 동양의 철학, 붓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삶에서 육체와 영혼같이 대립되는,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조르바는 육체를 주인공은 영혼을 상징한다. 초반에는 극과 극으로 대립하던 둘이 마지막에 함께 춤을 춤으로써 대립을 초월하고, 자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작가도 이 둘처럼 자신 또한 완전한 해방과 자유에 도달했던 것일까.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썼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자유다.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는 일부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 역시 무언가 이루어 내야 하는, 이름 모를 부담감을 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련을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산책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는데 조르바를 통해 내가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와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자유인이 아니다. 집착도 두려움도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다.

완전히 버리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죽음에 이르지 않고서야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지도 모른다.